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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극을 위한 소심한 변명 연극 ‘자메이카 헬스클럽’ 2018-02-02 17:26:36
달나라의장난 조회3,553

소극장 연극으로 돈을 버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허나 초반에 제작비를 투자하고 관객수입으로 그 이상을 벌기 위해선 대규모 뮤지컬이 아닌 이상 공연을 오래 지속해야만 가능하다.

그 이후엔 제작비용을 회수하고 러닝코스트에 해당하는 비용 이상을 꾸준히 벌기만 하면 수익이 생긴다. 지속가능한 콘텐츠가 되면 비로소 기획사나 극단을 운영할 수 있는 기반이 되는 것이다. 공연을 계속 유지하는 비용을 러닝코스트에 비유하긴 좀 애매하지만 어쨌든 매일매일 공연을 진행하기 위해선 배우개런티와 극장 대관료, 그 외 오퍼레이터들의 사례가 필수적이다.

 

그러면 당연히 러닝코스트를 줄이기 위해 배우수가 많아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꼭 러닝코스트를 줄이기 위함이 아니더라도 공연제작사가 배우개런티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다. 작년에 어떤 공연제작사의 실패에 대해 분석한 기사가 나왔는데 무리하게 스타마케팅을 하려다 배우 개런티가 전체제작비의 30%이상을 웃도는 경우가 많이 발생했다는 분석이었다.

 

공연제작에 있어서 배우개런티가 제작비의 30%를 넘지 말아야 한다는 게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지만 상업공연으로 수익성을 꾀하려는 제작사의 입장에선 중요한 잣대다.

 

이 글은 공연으로 돈을 버는 행위가 지극히 당연하다는 입장에서 쓰는 것이다.

현재 순수연극을 한다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엔 자신의 공연을 많은 사람이 알아줬으면 하면서

공연으로 이익을 남긴다는 것은 연극의 순수성에 대한 모독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순수연극. 무엇으로 순수와 불순을 판가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는 순수연극을 그저 비상업극이라 부르고자 한다. ‘순수라는 단어에선 왠지 모르게 작품성도 뛰어난 연극처럼 느껴지는데 그렇기 보단 그냥 자본주의적 논리에서 지배받지 않으려는 연극이라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연극 관련된 많은 시상식에선 비상업극들이 대부분 수상 한다. 정부의 지원금도 대부분 비상업적인 연극의 몫이다. 블랙리스트로 억압받았던 사람들이 정권이 바뀌고 다수의 수상연극이 되는 데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것이 단지 순수한 연극을 하기 때문에 받는 혜택이라면 순수연극이라는 의미는 그 이상도 그이하도 아닐 것 같다.

 

대중적이라 여기는 상업연극이 상과 지원금을 받는 일은 드물다. 작품성을 차치하고서 상업연극과 비상업 연극인들은 어느 샌가 배타적인 입장이 되어버린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배타성은 두 집단을 병렬로 놓고 봤을 때 상업극이 좀 하위인 것처럼 인식된다. 돈을 번다는 것이 공연장르 중 특히 연극에서 언제부턴지 저급한 일처럼 취급되었다. 90년대에 흥행했던 '벗는 연극'의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어서일까?

대한민국 연극계는 크게는 국공립단체의 제작시스템과 민간제작시스템에서 상업과 비상업으로 나뉘며 이 집단들이 상호보완적이나 선의의 경쟁구도, 혹은 자연스런 교류가 이루어지기보단 본의 아니게 대립과 갈등처럼 느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여있다.

사실 상업적인 연극제작사가 갑작스럽게 늘어나게 된 현상은 문화콘텐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짐과 동시에 이른바 연극계의 거장들이 이끌어온 극단의 쇠락과 맞물려 나타난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 전통의 극단들이 배우나 창작예술가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한 것이다. 공연으로는 먹고 살아야겠고 기존의 극단에선 답이 보이지 않으니 생겨난 자연스런 생태현상이라 생각한다. 오래된 극단들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특정 공연으로 돈을 벌어본 경험은 하나쯤 자랑스런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으니 말이다. 돈을 벌던, 예술적인 가치를 평가받아 명성을 얻던 결국 연극을 통해 돌파구를 찾고자 하는 마음은 모두가 똑같았다고 생각한다.

 

변화된 생태계를 몇몇의 극단이 수용하기는 버거웠고 젊은 배우들의 마인드도 더 이상 한 솥밥 먹는 도제식 시스템의 극단과 맞진 않았다. 연극에서 단련된 내공으로 하나 둘 드라마나 영화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전통의 극단들이 대중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지만 상대적으로 배우에 비해 극단의 파워는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상업적인 연극 제작사들은 이런 환경을 지켜보며 돌파구를 찾는 젊은 배우들을 끌어안았다.

여전히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긴 하지만 지난 10여 년간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공연예술관련학과 졸업생들에게 넉넉한 무대기회를 제공했던 것은 다름 아닌 상업연극이었다.

 

문제는 그런 상업공연들이 늘어남과 동시에 보이지 않는 연극공식이 생겼다는 것이다.

 

끝나는 일자를 정해두지 않는 공연(오픈런)을 계속 하기 위해선 배우수를 줄여야하고

연극을 처음 접하는 관객들의 심적 부담을 없애기 위해선 약간의 로맨스가 들어간 가벼운 코미디물이어야 한다. 그러다보니 공연 전에 관객들의 분위기를 풀어주기 위해 똑같은 가위바위보 게임을 하고 자신을 닮은 연예인이 누구냐고 퀴즈를 내며 예쁘고 잘생긴 연예인 이름을 대야 정답이라고 인정하며 특별히 준비한 상품을 내놓는다. 고급커피와 텀블러가 상품이라 해놓고 종이컵에 담긴 믹스커피를 건네는 장난을 친다. 연극을 처음 접하는 관객들에겐 무척 재밌다. 하지만 두 세 번은 못 본다. 연극내용도 몇 편만 보면 대충 읽힌다.

 

뻔한 구성은 남여 주연 두 명에 조연 두 명이라는 배우들 구성에서도 엿볼 수 있다.

남여 주인공은 예쁘고 잘생겨야하고 조연 두 명은 친근한 느낌의 외모로 주인공의 주변인물을 다양하게 맡는 다소 기능성이 강한 연기력을 갖춰야 한다.

 

이른바 멀티배역. 사실 1인 다 역이라 부르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멀티라는 말을 언제부터 썼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내 기억으론 아마 장유정의 연극에서 처음 보았던 것 같다.

그때의 멀티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단지 1인 다 역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한 배우가 여러 역할을 연기하는 과정을 대놓고 보여주는 그 자체의 재미를 의도한 것이 더 강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그 이후로 연극에서 다 역을 맡은 배우는 상업극이 아니어도 멀티배우라 불렸고 상업극에서의 정형화 된 멀티배우들은 멀티전용배우로 반복되는 경향이 생겼다.

또한 작품이 오래 공연되고 지방공연도 하다 보니 여러 팀이 필요했다. 그때마다 연출이 꼼꼼하게 연습을 리드하기 보단 배우들끼리 맞춰보며 단지 복붙하 듯 작품을 만들어 간다는 얘기도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가끔씩 뉴스에 보도되는 불미스런 일들은 이런 토양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상업극이 순수라는 이름으로 과도하게 포장된 것도 문제지만 -사실 비상업 극들 가운데서도 정말 성의 없게 만들거나 수준이하의 작품도 많다.- 상업극이 제작비를 무조건 낮추려는 무리수 때문에 벌어지는 비상식적인 일들과 안일한 태도로 프로덕션을 이끌어가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바로 이런 부분들 때문에 상업연극이 작품성에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매도되는 분위기가 생겨나지 않았다 싶다.

 



이 지점에서 자메이카 헬스클럽의 작품성을 논하기보다 지금껏 지적한 타성에 젖은 상업극의 공식을 깬 두 가지를 높이 평가하고 싶다.

 

하나는 억지로 분위기를 띄우려는 싸구려 바람잡이를 만들지 않았다는 것과 또 하나는 멀티배역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중에 작가와 연출에게 따로 들은 얘기지만 보통 멀티배역이 극에서 리듬을 살리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쓴다고 하는데 11역을 맡은 배우스스로가 보여주는 인물의 깊이와 다각적인 변화에서도 충분히 극의 리듬을 살리는 게 가능하다는 믿음 때문에 11역으로 갔다고 한다.

 

그렇다고 배우수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일반적인 상업극처럼 배우수를 줄이기 위한 패턴은 비슷했다. 처음 쓴 원작에선 11명의 등장인물이었지만 4명으로 줄였다. 4명의 배우가 소화라는 단 4명의 역할. 멀티역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극적 단조로움을 느끼는 관객도 있겠지만 이미 진부해진 상업극공식이 무엇인지 진단했고 극복하려는 노력이 보였다는 것이다.

 

사실 상업극의 공식을 깼다고 해서 다른 연극인들의 시선이 확 달라지거나 일반 관객들이 그것을 구분하고 박수쳐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해결하기보단 발견하는 것이 더 어렵고 중요하다.

아무도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환경에서 문제로 인식하고 개선했다는 노력.

 

역설적으로 이런 작은 일들이 진짜 연극계 내에서 선입견을 없애는 길일지도 모른다.

 

소수인원의 평가로 상을 주고받으려 자축하며 작품을 극찬하기보단 어떻게 하면 다수의 관객들 앞에 심사표를 던져줄지를 고민해야한다. 그래야 우리사회가 연극을 지원하고 많은 관객들이 봐야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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