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플레이투스테이지 - '비틀즈 매니저' 앱스타인을 동경했던 백강기...'30주년' 부활을 만들다 | 2016-11-28 10:38:15 | ||||||||||||||||||||||||||||||
플티 | 조회6,456 | ||||||||||||||||||||||||||||||
[문화뉴스] 공연을 소개하고 공연을 이야기하고 공연을 만나보는 공연전문방송 플레이투스테이지. 부활 전 매니저이자 최근 '나는매니저다'를 출간한 백강기와의 인터뷰. Q. 부활이 30주년이 되었다. 느낌이 남다를 것 같다. 이후에 보컬들이 떠나고 시간이 흐른 뒤 김태원이 발굴한 보컬이 바로 김재기였다. 그는 천재 보컬이면서 비운의 보컬이었다. 3집을 내는 과정에서 녹음 도중 사망했다. 4집까지 발표하고 부활과 작별했다. 나는 부활의 초창기 때 동력을 불어넣은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까지 부활을 이끌어온 것은 부활이라는 엔터프라이즈의 함장 김태원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Q. 김태원 씨와의 첫 만남이 드라마 같았던 걸로 아는데 지미 핸드릭스의 리틀 윙(Little Wing)을 첫 곡으로 연주했는데 내 몸에 전율이 돌았다. 그다음엔 베이스 이태윤이 게리 무어의 엠프티 룸(Empty Rooms)을 불렀다. 이 역시 나를 감동시켰다. '어떻게 20대 초반이 저런 연주를 할 수 있을까'하는 놀라운 마음을 감추고 팀 공연이 끝나자마자 곧장 대기실로 찾아갔다. 처음엔 팀 이름이 T.N.T.인줄 알았다. 나이도 내가 한참 많고 기죽어 보이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잔뜩 폼을 잡고 팀의 리더를 찾았다. "방금 공연한 티앤티의 리더가 누구야?", "야 티앤티 화력 좋은데"라고 말하자 '전데요"라고 손을 든 사람이 바로 김태원이었다. 나는 그때 김태원에게 클린트 이스트우드 같은 카리스마를 느꼈다. 지미 핸드릭스 얘기로 잠깐 넘어가자면 지금의 록 기타리스트들 중에 지미 핸드릭스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 세계적인 3대 기타리스트에는 영국 출신의 에릭 클랩튼, 지미페이지, 제프백이 있다. 이 영국의 3대 기타리스트 자리 위에 등극한 사람이 바로 지미 핸드릭스(미국)이다. 당시 김태원이 위대한 기타리스트 지미 핸드릭스 곡을 카피한 것만으로도 대단했지만, 성능이 좋지 않은 국산 앰프로 그런 소리를 낸다는 것이 더욱더 놀랍게 느껴졌다. 그래서 내가 매니저를 자청한 것이다. TV 드라마 '락락락'(KBS 2010 방영)에서도 나오지만, 김태원을 만날 당시 나는 스물아홉 서른 무렵이었고 김태원도 이십 대 초반이었다. 내가 매니저를 자청했을 때 김태원은 시큰둥했다. 왜냐하면, 그때 당시 음악계는 조용필 전영록 같은 사람들이 인기를 끌고 있었고 밴드의 음악은 송골매 산울림 정도로 흔치 않았던 시절이었다. 록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앨범 하나 내기도 어려운 시절인데 매니저까지 둔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던 것이다. 그래서 김태원도 내 제안에 '설마'라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들었던 것 같다. 그것도 오히려 나에겐 행운이었다. 만일 누군가가 김태원의 역량을 먼저 알아봤다면 나에게 '부활'을 키울 기회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Q. 같은 날 신대철의 공연도 보았는데 만약 김태원이 아닌 신대철의 매니저가 되었다면 어땠을 것 같나? Q. 메탈그룹 블랙홀의 앨범을 제작한 이력이 있다. Q. 이후 밴드 매니저를 그만두고 엉뚱하게 골프팀 감독으로 변신하여 선수들을 육성하였다. 이왕 경쟁을 통해 순위를 매길 거라면 차라리 스포츠가 낫겠다 싶었다. 사람들은 '운칠기삼'이라는 말을 자주한다. 언뜻 들으면 실력 없이 운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그건 아니다. 프로축구나 야구선수의 예를 들어보자. 출전의 기회가 없다면 관계자나 팬들의 눈에 띌 수가 없다. 그래서 선수들은 출전의 기회를 얻기 위해 일단 감독 눈에 들고 잘 보여야 한다. 그리하여 선발라인업의 결원이 생겼을 때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운'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때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허사가 되고 만다. 그 기회를 계속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한 실력이 평소에 뒷받침되어있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운칠기삼'을 논해야 한다. Q. 앞선 부활의 매니저와 스포츠매니저 이야기를 모아서 낸 책이 바로 '나는 매니저다 '다. 그런데 출판사 사장이 직접 쓰라고 했다. 전문작가가 아니지만, 나의 투박한 문체 그대로 서술한 것이다. 그냥 살아온 인생을 변사가 말하듯이 그렇게 편안하게 써내려갔다. 그 점을 독자들이 좋게 봐준 것 같다. 아주 수준 높은 상감청자의 매력도 있지만 투박한 뚝배기의 매력도 있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나의 그런 모습이 드러난 것 같다. 사실 책을 낼 것을 결심하게 된 중요한 이유가 있다. 조금 지난 일이긴 하지만 이승철이 부활을 떠난 뒤에도 방송에 나와서 나를 '조폭 매니저' 같은 사람으로 이야기했다. 당시엔 화도 많이 났지만, 김태원의 만류로 적극적인 항의를 하지 않았다. 초창기 부활에서 김종서가 얼마 활동하지 않고 팀을 떠나간 뒤에 이승철이 들어왔다. 오디션을 보기 전이었는데 그때 김태원이 나에게 "아직 어리고 건방져질 수 있으니 노래 실력에 너무 칭찬하지 말라"는 얘기를 했다. 이승철은 오디션에서 김현식의 '사랑했어요'와 딥 퍼플의 명곡 '솔져 오브 포춘(soldier of fortune)'을 불렀다. 나에겐 놀라움 자체였다. 김태원에게 "어떻게 이런 보컬을 칭찬하지 않을 수 있냐"고 했다. 하지만 그때 분위기가 극찬하면서까지 보컬을 영입할 수 없었다.
나중에 이런 첫 만남의 이야기를 어느 골프 블로그에 올렸다. 그 글을 보고 당시 이승철의 팬으로 짐작되는 누군가가 앞뒤의 문장을 떼고 내가 이승철에게 엄하게 대한 사실만을 따다가 퍼트린 것이다. 그래서 '이승철을 혼내는 것을 김태원이 사주했다'는 오해까지 번지게 되었다. 내가 책을 쓰고 이런 인터뷰를 통해 밝히고자 하는 것은 이승철을 욕하고자 함이 절대 아니다. 나도 세상을 살면서 아버지로서 그리고 인격을 가진 사회구성원으로서 더 이상의 오해를 받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SNS를 시작했고 정치나 종교의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과거와 현재의 나의 이야기들을 써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별 반응이 없었지만 5년 정도 하다 보니 사람들이 알아보고 결국 출판사의 제안까지 받게 된 것이다.
Q. 아주 최근에 또 SNS에 올린 내용이 기사화될 정도로 뭔가 터트리셨다. 사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실망이 너무 컸다. 우리 집안은 오히려 보수 쪽에 가까웠다. 예전에 우리 아버지는 영화배우 신영균 씨가 공화당 공천을 받아 국회 의원출마를 했을 때 선거운동을 돕기도 하셨다. 육영수 여사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이미지도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 보여준 박 대통령의 모습에서 그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라의 수장이 무당의 사주를 받고 대포폰을 쓴다는 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이런 것이 정말 조폭이고 깡패 아닌가. 이승철에 대한 개인적인 섭섭함은 있을지 몰라도 내가 초창기에 부활의 매니저로 그를 키워냈다는 사실도 뿌듯하고 2014년 소치올림픽 폐막식에서 나라를 대표하여 노래를 불렀다는 것도 나에겐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Q. 연예계의 큰손이 될 기회가 있진 않았나? 나도 연예계에 더 있었으면 다른 아티스트를 키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연예계를 그만둘 때 돌아보니 ‘내가 어디 가서 또 이승철, 김종서, 김재기 같은 천재 보컬을 만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명 만나기도 어려운데 세 명씩이나 만난 것은 돌이켜보니 나에겐 행운이었다. 그래서 미련을 버리고 연예계를 떠나 보육원에서 골프선수를 키웠다. 책의 내용도 골프감독으로서의 이야기가 훨씬 더 많다. 골프매니저로 변신한 뒤 나의 아들을 프로골퍼로 만들었다. 그것은 단순히 혈육의 정만으로 될 문제가 아니었다. 역시 스포츠 선수와 매니저 간의 일이었다. Q. 말을 물가로 데려갈 순 있어도 그 물을 억지로 먹일 수는 없다는 말이 있다. 매니저라는 것은 본인이 잘해서가 아니고 기다림의 연속이었을 텐데 그런 것이 성격에 맞았는가? 매니저란 직업을 가진 이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요즈음의 매니저는 전화통화하고 운전하고 스케줄관리가 전부인 것처럼 보인다. 매니저는 제작자의 마인드가 있어야 한다. 나는 비틀즈의 매니저 브라이언 앱 스타인을 동경했다. 노래를 잘하는 비틀즈도 좋았지만 그런 비틀즈를 움직이고 음반을 제작하는 매니저가 멋있어 보였다. 제작비를 대는 전주는 아닐지 몰라도 그 뮤지션의 음반제작과 공연기획을 총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 자리를 빌어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은 사람이 내 친동생 민해경이다. 나는 당시 최고 스타였던 민해경의 매니저로 연예계에 입문했다. 이후에 부활을 발굴하고 앨범 제작을 주도하긴 했지만, 여동생인 민해경의 제작비 지원이 없었다면 부활의 1집은 만들어질 수 없었다. 해경이가 그것을 생색낼 사람도 아니지만, 김태원과 이승철은 분명히 그녀의 도움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내 가족인 것을 떠나서 음악인의 한사람으로 오늘의 부활을 있게 한 초기의 공로는 인정받았으면 좋겠다. 그런 부활이 30주년을 맞았고 12월 9일~10일 그리고 31일에 의정부예술의 전당과 서울 그랜드 힐튼호텔에서 공연을 한다. 많은 분이 관심 가지고 보아주시면 좋겠다. Q. 책 판매는 어떠한가?
- 충남 서천 출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