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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뉴스] 플레이투스테이지 -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초대이사장 신종호 2017-04-23 16:4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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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뉴스 MHN 아띠에터 김효상] 공연을 소개하고 공연을 이야기하고 공연을 만나보는 공연전문방송 플레이투스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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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투스테이지의 58회 출연자는 비올라 연주자 신종호이다. 그는 구리시교향악단과 서울아산교향악단 음악감독을 역임하였고 2015년 11월 재단법인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초대이사장으로 취임하여 장애인문화예술센터'이음' 개관과 함께 2년째 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 플스 58회 방송 바로 듣기 


플스 58회 게스트.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신종호 이사장

Q.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탄생배경과 장애인예술활동에 대한 현실은 어떠한가?

ㄴ'이음' 센터는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바로 옆에 있다. 예전에 예총회관이 있던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재)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과 센터가 들어선 것은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장애인예술단체는 대부분 서울에 집중되어있다. 공식적으로는 20여 개 단체가 있지만, 그 외에 동호회 형태로 많이 존재하고 단체뿐만 아니라 개인으로도 많이 활동하고 있다. 사실 비장애인이 예술활동을 하기도 어렵다. 그 점에 있어선 장애인 단체들이 생존해나가기가 더 힘든 상황이다. 

이런 현실로 비추어 봤을 때 문화체육관광부가 이처럼 공공기관인 재단법인 장애인 문화예술원을 만든 것은 의미가 크다. 이젠 국가의 수준을 따지는 것이 국민소득이 아닌 문화와 복지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애인들을 위한 정책을 개발하고 실력과 재능을 펼칠 수 있도록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장애인예술활동을 부족한 사람들의 활동이 아닌 일반 사람들과 조금 다른 특별한 사람들의 예술이라고 봐줬으면 한다. 장애인문화예술원은 TV의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우리 장애인예술원도 재능을 가진 장애인을 발굴하여 지원하고자 한다. 


Q. 장애인문화예술원의 주요사업과 설립 초기에 비해 달라진 것이 있다면?

ㄴ 초기에는 장애인 문화 향수사업이라고 해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부터 예산을 배정받아 사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올해 2017년부터는 그 사업이 우리 문화예술원으로 넘어와서 직접 사업을 주관하고 예산을 집행하고 있다. 그래서 연간 이런저런 사업비가 80억 정도의 규모가 되었다. 

주요사업은 매년 하는 장애인예술축제가 있고 2, 3월에 공모하여 지원하는 문화 향수사업 있다. 그리고 우리 센터에는 공연장과 갤러리, 커뮤니티룸이 있기 때문에 대관사업도 한다. 마로니에 공연에서 하는 장애인의 날의 행사도 직접 주관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화예술원이 있는 건물 이름이 이음센터다. '이음'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잇고자 하는 데 있다. 그래서 내가 취임하자마자 '아름다운 이음전'을 개최하였다. 장애인 작가 3명과 비장애인 작가 3명을 파트너로 연결하여 작품을 전시한 행사였다. 공연으로는 조금 다른 밴드라는 의미의 '조다밴'을 결성하였다. 이것도 역시 장애, 비장애인이 함께한 밴드다. 

올가을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출연하는 비상이라는 뮤지컬을 선보일 예정이다. 황정민 배우를 홍보대사로 임명하는 제작발표회 행사를 했다. 이처럼 장애인문화예술원은 이음센터를 기반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자 하는 것이 사업추진의 큰 방향이다. 


대학로 이음센터 사무실


Q. 이음센터를 소개한다면? 

ㄴ 다목적 극장이기 때문에 전 장르의 공연을 하고 있다. 어른들을 대상으로 한 공연뿐만 아니라 어린이 공연도 많이 올리고 있다. 이음센터는 화장실에서부터 공연장, 커뮤니티룸, 갤러리 등 모두 턱이 없고 이동이 편하게 되어있다. 장애인에게 편하다면 비장애인들에게도 편할 것이다. 작년 통계를 보니 이음센터 방문자가 20만 명 가까이 되었다. 대학로의 명소가 될 것으로 생각하고 올해는 더 큰 기대를 하고 있다. 요즘은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좋아졌다. 그래서 건물을 지을 때도 장애인 편의시설에 대해 사람들이 고민하는 것이다. 


Q. 장애를 극복한 비올라 연주자로 활동하였고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도 역임하였다. 음악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ㄴ 음악인으로 삶을 살아왔다. 예술을 했으니 집안 형편이 좋을 거라 생각을 하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선천적인 장애로 일반 학교를 다닐 수 없어 대전에 있는 성세 재활학교에 다녔다. 그때 어떤 선생님께서 자발적으로 우리 학교를 방문하여 바이올린을 가르쳐주셨다. 그 선생님의 재능기부를 받은 것이다. 초등학교 때였고 그게 계기가 되어 취미를 가지게 되었다. 

성세 재활학교에서 중학과정을 마치고 생계를 위해 기술을 배우러 일본으로 연수를 갔다. 일본 뱃부에 있는 '태양의 집'이라는 곳이었는데 장애인들을 위한 공장을 만들어서 일할 수 있게 설계된 공동체 형태의 도시였다. 그곳에 1년간 산업연수를 다녀왔다. 그게 70년대였으니 그 당시에 일본과 한국의 경제 상황은 차이가 크게 났다. 

기술을 배우고 돌아왔지만, 막상 한국의 산업환경에선 써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다시 음악에 눈을 돌렸다. 당시만 해도 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돼 있었다. 비록 장애를 가졌지만 '왜 정해진 직업만 가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졌고 음악으로 내 삶을 바꾸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한데 음악은 조기교육과 전공이 뒷받침되어야 했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먹었다 해도 쉽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또 한 분 선생님의 도움으로 성세 재활학교 출신의 장애인들로 구성된 베데스다 현악 4중주 팀을 결성하였다. '베데스다'라는 뜻은 요한복음 5장 2절에 나오는 연못 이름인데 히브리어로 '은총의 샘'을 뜻하며 어떤 병도 고친다는 곳이다. 그 이후로 본격적으로 연주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때 바이올린에서 비올라로 파트를 바꿨고 4명이 합숙하며 하루 10시간 이상씩 연습하고 음악을 공부했다. 서울에 상경하여 공부를 이어갔지만, 한계에 부딪혀 미국유학길에 올랐다. 


일본센다이 연주때 모습

Q.장애인악단이라는 동정의 시각은 없었는가? 

ㄴ 사실 팀 결성 초창기 5년 동안엔 다소간의 동정 시각은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시각을 떨치기 위해 우리는 노력했다. 그 결과 비장애인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에 들어가 활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미국유학까지 이어진 것이다. 마치 하나님의 뜻처럼 내가 필요할 때 뜻하지 않게 좋은 분들이 나타나서 도와주었다. 노력도 있었지만 뜻하지 않은 행운과 기회가 찾아온 것도 많았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Q. 미국유학 시절에 기억 남는 것은? 

ㄴ 미국 신시내티 음악대학에서 공부했다. 내가 재학시절 우리 음대 오케스트라가 미국 전국경연에서 우승해서 카네기홀연주를 하게 됐다. 카네기홀은 사실 클래식 전공자들에겐 꿈의 무대와 같은 곳이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장애인 유학생은 지휘자 선생님께 찾아가서 그 연주에 참여하지 못하겠다고 말씀드렸다. 휠체어를 탄 우리가 오케스트라에 껴있으면 관객들 보기에 좀 그럴 것 같다는 이유였고 그 시절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많던 한국인의 정서상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얘기를 들으신 지휘자 선생님은 오히려 크게 화를 내며 우리를 야단치셨다. '음악은 듣는 것인데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는 우리 사고방식에 대한 꾸짖음이었다. 휠체어를 타고 연주한다고 해서 그 오케스트라가 질이 낮아진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시며 우리를 공연에 참여시켰다. 


Q. 장애인들이 문화예술 활동을 통한 긍정적인 변화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ㄴ 장애인 예술작품이 비장애인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체계적인 공부를 할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곳 이음센터가 그것을 업그레이드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다. 문화예술활동은 다른 어떤 직업활동보다 장애인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자기만의 세계를 가질 수 있고 그것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고 자신도 치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몸이 불편한 것이 일반 사람보다 부족하다기보단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장애인 예술가들이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예술적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를 많이 봤다. 그리고 예술활동을 통해 변화하는 모습도 확인했다. 자존감에서부터 개인적인 심성이나 가족 안에서의 관계가 호전되는 경우가 많았다.

비장애인도 예술활동을 통해 자기와 싸움을 하지만 장애인이 극복해낸다는 것은 더 의미가 있다. 사실 한 사람의 장애인이 가족과 주변의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크다. 그만큼 주변의 사람들도 힘들다는 것이고 자칫 갈등으로 번질 수 있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놓고 봤을 때 장애인이 경제적 자립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술로 인해서 마음이 치유되고 건강해지는 것이 훨씬 효과가 크다고 생각한다. 문화예술로 인해서 한 장애인이 사회에 녹아드는 것이다. 


뮤지컬 비상 제작발표 및 홍보대사 위촉식

Q. 아산교향악단 음악 감독 시절 병원의 로비음악회를 처음 시도하였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기획하게 되었나. 

ㄴ 아산 사회복지재단 소속의 아산교향악단은 간호사와 의사들도 구성된 악단이다. 그곳의 음악 감독으로 활동했고 거기서 정년 퇴임을 했다. 십수 년 전쯤 사랑의 로비음악회를 만들어서 점심시간마다 병원로비에서 나의 해설이 들어간 연주회를 했다. 병원 입원은 환자들도 힘들지만 간호하는 보호자와 가족들도 힘들다. 교향악단은 환자들과 가족들에게 약이 아닌 음악으로 치료하는 것을 시도한 것이다. 점심시간마다 로비에서 연주를 기다리고 좋아하는 모습을 많이 봤다. 로비음악회의 또 다른 의미는 공연장에서 관객을 기다리는 클래식이 아니라 먼저 다가갔다는 데 있다. 옷을 잘 차려입고 관람하는 소수만의 클래식 문화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감상할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로비에서 펼쳐지는 클래식연주문화가 자연스러워졌다. 


Q. 장애인문화예술원의 향후 계획과 비전은? 

ㄴ 훌륭한 시는 아직 쓰이지 않았고 훌륭한 노래는 아직 불리지 않았다. 하늘의 수많은 별 중에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별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긴 여정이 될 것이라는 뜻이다. 내가 맡은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초대이사장이란 자리가 마치 하얀 벽지에 처음 밑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은 입장이다. 내 마음대로 할 수도 있지만 내가 어떻게 그려 가느냐에 따라 방향이 달라지는 거라 무척 조심스럽다.

큰 욕심을 부리기보단 천천히 튼튼하게 갖춰가겠다. 많은 사업도 중요하지만, 서울뿐만 아니라 지역에도 지부를 신설하는 조직화 사업도 시행해야 한다. 장애인문화예술원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장애인문화예술의 르네상스 시대가 오길 바란다. 그리고 북한의 장애인들과의 문화예술 교류사업도 추진하고 싶다.


플스 58회 방송을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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